기말고사가 끝나고 동장군이 찾아올 때쯤 학사의 방이 비워지기 시작했다. 이번 학기에 졸업한 사생은 없었지만, 추위를 피해 집으로 혹은 해외로 간 친구가 있었고 각자의 사정에 따라 학사를 떠나면서 영원할 것 같았던 우리들의 동거가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독 이번 학기는 복도와 화장실만 공유했던 지난 학기의 분위기와 달리 서로의 개성이 불편함을 넘어 돈독해지는 시간이 많았던 학기였기에 이야기로 가득 찼던 방이 비워지는 것이 좋지만은 않았다. 종교 색채를 가진 학사이기에 규정을 지키기 위해 서로의 방을 넘나들며 간섭했던 순간들이 불편하면서도 소중했던 것이다.

십 개월 동안 스무 명 남짓한 학생들과 함께 살았지만 내가 잠시 방을 비우는 걸 기억해준 것은 현근이가 유일했다. 처음 학사를 들어왔을 때 덩치도 있고 얼굴도 크고 가장 큰 방을 차지하고 있으며 총무를 맡고 있기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가장 나이가 어린 동생이 현근이었다. 현근이는 형들을 잘 따르는 경향이 있고, 장난을 잘 치지만 중요한 때에 관계의 선을 잘 지키는 친구였기 때문에 학사에서 가장 재미있는 친구였다. 학사를 코인노래방으로 만들어버리는 엄청난 목성과 큰 방에 아무것도 놓지 않고 딱딱한 바닥에 그냥 누워 3초면 잠에 빠지는 실용성과, 9시면 자버리는 그의 아침형 생활은 학사에서도 꽤나 재미있는 이야깃 거리였다.

그런 현근이가 나의 학사 생활 중 일부였다. 함께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고 아주 가끔 마시면 안 되는 맥주를 마시며 강바람을 맞거나, 화장실에서 함께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다른 친구에게 꾸중을 들었던 순간도, 한 여름 옥상에서 에어컨을 틀고 함께 자던 순간도, 서로의 연애를 위해 기도하고 방문을 두드려가며 조언을 주고받은 시간들은 지난해 나의 행복한 시간으로 남아있다. 가장 어렸고 성실한 친구였기에 누구도 현근이가 학사를 떠날 거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 역시 201호가 빈 방이 되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만큼 힘들어하는 현근이의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2년 차에는 항상 고민이 많아지는 법이다. 교수님 밑에서 연구하며 군대도 안 가게 될 것 같다는 당찬 포부에 나와 친구들은 현근이가 슬럼프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애석하게도 현근이는 연구와 공부에 위기가 찾아왔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게임에 빠져있는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듯했다. 재수시절 이후로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해 보고 항상 문턱에서 실패하고 만 것도 한몫했겠지. 목소리도 좋고, 잘 생겼고, 성실한 돌 아이임에도 연애를 하지 못하는 것은 운이 나쁜 거라고, 격려 아닌 치킨으로 위로했던 여러 밤이 있었다.

내가 바쁜(?) 날들이 많아지면서 사생들과의 시간이 줄어들었고, 현근이와의 서울살이를 공유하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고민을 나누는 시간도, 서로의 정서를 위해 장난치며 자아를 해방시키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어쩌면 그때에 현근이는 그 큰 방을 자기의 고민으로 채워져 갔을 지도 모르겠다. 늦은 밤 학사에 돌아와 시험 기간에 켜져 있는 그의 방 불빛을 보면서 웬일로 안 자고 공부하는 것인지 문을 두드리거나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현근이는 누구보다 풀이 죽어 있었다. 살짝 아래를 바라보면서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라고, 자기 학사를 떠나게 됐다는 말에 나는 근처 패스트푸드점으로 현근이를 불러냈다.

현근이는 자신을 고치고 싶어 했다. 사생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본인의 삶에 누군가 더 개입해주기를 원하였다. 동아리에서의 공동생활이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라며 곧 학사를 떠나 학교 앞 투룸으로 이사 간다고 했다. 나는 현근이의 문제가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과 더불어 든든한 아군을 떠나보내는 것이 정말로 정말로 아쉬워서 붙잡았다. 가지 말라고, 공부가 문제가 된다면 같이 공부방에서 공부하자고, 과장을 더해 방 문 부수고 들어가 공부하는 거 감시하고 함께 기도할 테니 떠나지 말고 이곳에 있어달라고 마음속 간청을 전달했다. 내 말이 통했던 것인지 스스로를 더 믿어보기로 생각하게 된 건지, 더 생각해 보겠다는 현근이의 말에 조금 위안이 됐다. 다만 쓸쓸하게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의 방은 이미 정리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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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이 오히려 현근이에게 부담이 되었던 것일까? 현근이는 학사를 떠났음에도 내가 독일로 나오게 되는 날을 기억하고 잘 다녀오라는 문자를 보내 주었다. 그가 떠나던 날 사생들끼리 회식을 했지만, 나는 성탄제 준비로 인해 정말로 바빠서 함께하지 못했던 것이 마치 내가 삐진 걸로 이해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더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고, 학사에 남겠다고 대답하지 않았으면서 자신의 선택에 내게 미안함을 느꼈던 것이라 생각했다. 이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그간 나와 현근이의 관계 사이에서 이 정도 오해는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웃음으로 넘겨듣고 너도 잘 지내라는 말을 보냈다.

빈 방을 보는 것은 내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현근이의 방은 누구보다도 부족해 보이고 허전한 방이었다. 가구는 작은 책상과 옷을 두는 몇몇의 가구가 전부여서, 그래서 그 공간을 사람과 감정으로 채우곤 했는데, 그 온기마저 싹 사라져 있었다. 선택을 따라 자기의 길을 걸어간 것을 존중해야 하지만, 옆에서 더 잡아주지 못하고 함께 보낸 시간이 무색하게 멀어져 간 시간이 나에게 책망하는 듯 마음에 응어리를 얹어주었다. 아마도 현근이는 혼자 있는 시간을 비워내고 싶었을 것이다. 형들과 함께 놀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지만, 알 수 없고 그렇다고 인정할 수 없는 것도 아닌 20대 자기 자신들의 일로 학사가 개인화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끈끈한 곳으로 떠나서 자신을 비워내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기 자신을 채워나가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현근이의 미니멀리즘에 동감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우리 모두는 혼자 있고 싶어 하지만, 사실은 외로움을 채워줄 최소한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공간을 비워내고 새로 차오를 것을 기대해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용기가 필요하겠다고. 학사는 그렇게 빈 방을 새로운 누군가로 채워져 가겠지. 다만 혼자가 작아지고 함께하는 것이 커지는 미니멀하며 동시에 맥시멈이 되는 그 친구의 생각이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