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12일 낮 예배 설교
성경: 신 30:15-20 제목:“두 가지 선택”
얼마 전, 필립핀에서 한국인 조태환 선교사가 괴한의 총에 맞아 죽은 슬픈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선교지를 둘러보러 온 분들을 태우고 숙소로 가는 길에, 괴한이 차를 세우고 문을 열라고 했답니다. 조 선교사가 문을 열면, 모두 위험할 것 같아 문을 열지 않고 버티자, 총을 쏴 죽였습니다. 그리고, 일행의 금품을 빼앗은 후, 여인 한 사람을 인질로 끌고 가려하자, 여자만 보낼 수 없다며 목사님 한 분이 자원해서 인질로 끌려갔다가, 얼마 후 두 사람 다 무사히 풀려났습니다.
갑자기 괴한이 총을 들이밀며‘문 열어.’할 때, 문을 열지 안 열지 순간의 선택입니다. 안 열면 자신에게 위험이 있고, 열면 다들 위험할 수 있습니다. 또, 여인을 인질로 데려가려 할 때,‘나도 따라가겠소.’역시 순간적인 선택으로, 가만있으면 자신은 안전하지만, 인질로 끌려가는 여자가 어떤 어려움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럴 수 없다는 마음에‘나도 따라 가겠소.’조 선교사나, 목사님이 어떻게 순간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남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평소에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자신만 생각하고 몸을 사려 살았다면, 자신을 위험에 던지는 그런 선택을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이로서, 항상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했기에 가능했지요. 그런 큰 선택은 아니라도, 우리는 살면서 하루에도 여러 번, 선택을 합니다. 갈까 말까, 어느 물건을 살까, 말까, 기도하고 성경을 읽을까 다른 것을 할까, 때론 화를 낼까, 참을까, 그 선택에 따라 만족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후회하지요. 마치, 앞에 많은 갈림길이 놓인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비슷한 환경에 사는 사람이라도, 전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고, 그 결과가 전혀 달라짐을 봅니다. 알코홀 중독자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두 청년이 있었는데,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집을 떠났습니다. 몇 년 후에, 부모의 알코홀 중독이 가정의 어린이에게 주는 영향을 조사 분석하던 연구관이, 두 형제를 인터뷰를 하게 됐습니다. 두 사람이 한 말은 똑같이‘당신이 그런 아버지를 두었으면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말은 같았으나, 한 아들은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두었기에 엄청난 고통을 겪었으니, 내 자녀들에게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다른 아들은 아버지처럼 알코홀 중독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둔 내가 별 수 있겠느냐, 자포자기로 술에 절어 살았지요. 같은 아버지,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들의 선택이 달랐고, 결과도 엄청 달랐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어가 아니라, 있는 위치에서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구약의 요셉이 그랬지요. 요셉이 부잣집 아들로 사랑받으며 살았는데, 형들이 질투해서 종으로 팔았지요. 종된 신세를 한탄하며 자포자기 했다면, 그러다 허망이 죽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어려운 종살이지만 열심히 해서, 주인이 그 집안의 모든 일을 맡기게 되었고, 또, 안주인의 유혹을 물리치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지만, 역시 낙심치 않고, 옥에서 열심히 일해서, 옥 안의 모든 일을 맡게 되었지요. 결국,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가뭄에 고통 받는 애굽 백성과 자기 일족을 살려냈습니다. 억울하고 어려워도, 바른 선택을 한 결과입니다.
오늘말씀을 보니, 여호와께서‘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두 가지 중에 선택하라 하십니다. 3천년도 더 전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백성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말씀의 앞인 14절을 보면, 하나님말씀은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 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생명과 복을 얻는 길이 저 멀리 있지 않고, 지금 우리 앞에, 사망과 화의 길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선택에 따라 생명으로나, 사망으로 갑니다.
같은 말씀이 19절에 반복되고 있지요. 선택의 내용은 같은데,‘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가 더 있습니다. 두 가지 의미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생명과 복이나 사망과 화를 주신다는 약속은, 하늘과 땅처럼 전혀 변화가 없이 반드시 지켜진다는 것입니다. 모세 때나 지금이나, 수천 년이 지나도 약속은 같습니다. 또 하나는, 여호와의 약속이 수천 년이 지나도 변화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늘과 땅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어느 누구도 수천 년을 살며 확인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변함없는 약속이기에, 후손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19절 끝에‘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해 생명을 택하고’우리가 바른 선택을 하면, 자손들이 생명과 복을 누립니다. 함께 출 20:5 을 찾아 읽습니다.‘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는, 생명과 복을 선택한 자이고, 그 후손도 그것을 누립니다.
말씀에, 하나님이 생명과 복, 사망과 화를 우리 앞에 두셨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것을 택하기를 바라실까요? 여러분 생각에,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택해라, 그 뿐일까요? 아니지요. 당연히 생명과 복입니다. 19절에도, 자손이 살기 위해 생명을 택하라 하셨지만,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주셔서 영생을 얻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명과 복을 택하길 바라십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이런 질문을 가진 분계시나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니까, 모두 다 생명과 복을 누리게 하시면 되지, 뭘 선택하게 하시나? 오늘부터 모두 다 천국하면 끝이잖아? 하나님은 왜 우리가 선택하게 하셨을까? 성도로서 바로 알아야 할,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류 모두를 구원하고 싶지만, 동시에 의로우신 하나님이기에 다 좋다고 할 순 없습니다. 다 영생이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가 없었지요. 저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만난 곳입니다. 의로운 하나님은 죄를 용서할 수 없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으나,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믿는 자는 누구나 모두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도 어쩔 수없이, 사망과 화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바로 앞에 놓인 생명과 복을 선택하고 누릴 것인가, 아니면 외면하고 사망과 화의 길을 갈 것인가,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 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지 않았으면, 선택할 것도 없이 우리 모두 죽음이니까요.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신 하나님은 한 영혼이라도 더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생명과 복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한데, 사람들이 살아온 모습이 어떠할까요? 성경에서 두 경우를 살펴봅니다. 하나는, 생명을 선택했으나, 얼마 안 가 사망 길로 간 이들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24:15,16을 읽습니다.‘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이끈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을 날이 가까워오자, 백성들을 다 모아놓고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는데, 너희는 너희 섬길 자를 오늘 선택하라하자,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어진 말씀을 보면,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도 잘 압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다른 신들을 섬기며 타락해 갑니다. 결심을 해도 쉬이 흔들리는 인생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잘 해야지, 마음먹고도 며칠 못 가지 않습니까?
또, 한 예를 봅니다. 왕상 18:21,24을 읽습니다.‘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아합왕과 이세벨왕비가 나서서 바알 신을 열심히 섬기니 모든 백성들이 따랐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을 갈멜 산에 모으고, 너희가 어찌 여호와와 바알 신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느냐, 하면서 제안하기를,‘제단에 제물을 쌓아놓고, 바알선지자는 바알 신에게, 엘리야는 여호와께 기도해서, 불을 내려 응답하는 신이 참 하나님이라 하자’백성들이 다 좋다고 합니다. 달리 할 말이 없지요. 바알선지자는 하루 종일 춤추고 소리를 질렀지만, 응답이 없었으나, 엘리야의 기도 몇 마디에 불이 내려 제물과 제단을 다 태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이 내려 제물을 태운 것을 눈으로 직접 볼 때는,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라고 소리를 질렀으나, 얼마가지 않아 그들은 다시 바알신에게 돌아갑니다. 인간은 거룩하고 경건하게 하나님을 믿고 섬기기가 힘듭니다.‘뭐, 하지 말라, 하지 말라.’귀찮고 싫습니다. 반면에, 바알 신전에서는 술 먹고 춤추며 음란한 짓을 마음껏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바알 신을 기쁘게 하면, 비를 내려주신다고 믿었지요. 내 마음대로 하고, 즐기고, 신의 복을 받고, 그리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주일 외에는 하나님을 찾고 따르지 않거나, 믿어도 내 삶이 거룩하게 변화되지 않거나, 믿으면서도 세상 즐거움이나 풍요만 좇는다면, 하나님을 떠나 현대판 바알 신을 섬기는 것과 비슷하다 할 것입니다. 비록, 힘들거나 다른 사람이 하지 않더라도 바른 선택을 해야, 우리가 좋고, 자손들에게 좋습니다. 사망과 화의 길이 아니고, 생명과 복의 길을 선택해서 가야 합니다. 생명과 복을 선택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생명과 복을 선택한 성도들은, 20절에 여호와를 사랑하라, 말씀에 청종하라, 의지하라고 합니다. 생명과 복을 선택한 자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한 대표적인 분이 아브라함이지요. 하나님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자, 두 말 않고 따랐습니다.‘아들을 주실 때는 언제고, 왜 그를 번제로 달라고 하십니까? 번제물이 필요하다면 소 백 마리, 천 마리라도 바치겠습니다. 그것도 안 된다면, 저를 바치더라도, 아들 이삭은 도저히 바칠 수 없습니다.’그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갑자기 주어진 명령이 아니고, 창 12장에서 시작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훈련의 결정판입니다. 마지막 시험이지요. 허물이 적지 않은 아브라함이지만, 믿음의 훈련을 거치면서, 아들까지 하나님께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난, 도저히 그럴 수 없어.’맞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자라면 그럴 수 있고, 그렇게 되도록 믿음이 자라야합니다. 오랜 믿음의 길에, 아브라함은 여호와는 사랑의 하나님이니,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데는 틀림없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난 그 이유를 모르지만,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야지.
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죽음 후도 주관하는 분임을 믿었습니다. 아들 이삭이 죽어도 갈 곳이 있음을 믿었기에, 아들을 칼로 찌르기 직전까지 갔고, 그런 아브라함을 보시고,‘네가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하나님을 세상의 그 무엇보다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믿기에,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기에, 나는 모르고 이해가 안 돼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을 바라보고 소망하기에, 현실의 모든 것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믿으며 죽을 것이냐, 믿음을 버리고 살 것이냐는 선택 앞에, 천국확신으로 웃으며 참혹한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그들은 죽었으나, 믿음의 승리자입니다. 교회 다녀도, 세상만 보고 살거나, 천국영생의 소망이 희미하다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힘듭니다. 저 십자가와 천국을 바라보며, 하나님사랑을 키워 가야합니다.
두 번 째로, 생명과 복을 선택한 이들은 하나님말씀을 청종합니다. 16절 가운데‘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신약성경 요일 2:5에‘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하나님말씀을 지켜야 하나님사랑이 그 안에 온전하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압니다. 요일 3:18 에‘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말씀을 지킴은, 입으로만 아니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합니다.
1850년대에 살았던 프랜시스 위라드란 여인은 열심히 공부해서, 35살 때 두 곳에서 동시에 청빙을 받았습니다. 한 곳은 노스웨스턴 대학에 높은 연봉으로 총장으로 모시려는 것이고, 다른 곳은 당장 먹고 살 것을 걱정해야 하는 기독교여성절제회의 시카고지부장입니다. 밤을 새며 기도한 끝에, 그녀는 명예와 부가 따르는 총장직 대신에, 절제회 지부장직을 택했고, 그 당시 꼭 필요로 했던, 여성해방과 노동자 지위향상에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내 유익을 돌아보지 않고, 여호와말씀을 청종한 결과로, 자신과 많은 이들에게 유익이 되었습니다. 청종하면, 일시적으로 손해 같으나, 끝은 큰 유익입니다.
세 번 째로, 여호와를 의지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아프지 않고 사는 것이 어렵지 않으면, 하나님을 잘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아프거나 힘들 때면 기도하며 매달리지요. 교회를 다녀도 그런 분이 꽤 있습니다. 필요할 때만 찾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그를 의지하며 살기 원하십니다. 의지한다는 것은, 그저 도움만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뜻에 따라야 합니다. 의지는, 나무둥지에서 물과 양분을 받은 나뭇가지가 합당한 열매를 풍성히 맺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청종하면서,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지요.
미국 남북전쟁의 초반에는 남군이 우세해서, 북군이 계속 패하기에 링컨대통령이 어려움에 처할 때가 많았습니다. 전쟁 중에 몹시 바빴지만, 링컨은 하루 두세 시간 꼭 기도를 했습니다. 많은 업무와 기도로 수고하는 대통령을 보면서, 북군의 지도자들이 모여 와서 위로합니다.‘대통령각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서 북군이 승리하게 해 달라고 온 교회가 날마다 눈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그러자, 링컨 대통령이‘그렇게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말에,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다 깜짝 놀랐습니다.‘예?’링컨은‘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항상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다.’우리는‘하나님 이거, 이거 도와주세요.’나는 가만있고 도와만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하나님 제가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 뜻을 이해하고 행하게 하옵소서.’진정한 기도요, 하나님을 바로 의지하는 삶이요, 생명과 복을 누리는 성도의 마땅한 삶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앞에 놓인 생명과 복이냐, 죽음과 화를 선택하는 것 같으나, 그 이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선택하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시 71:6)에‘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다윗의 찬양인데, 어머니 배에서부터 나를 택하셨다고 합니다. 성경 곳곳에, 사랑의 하나님이 미리 우리를 택하셨다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천국에 보내려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셨습니다. 그것을 믿는 우리들이 생명과 복 외에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약하고, 세상의 유혹은 강해서, 또 눈앞의 것에 더 끌리기에, 두 가지 선택 가운데 머뭇머뭇하거나, 입으로는 생명과 복을 택했다고 하고, 몸은 사망과 화의 길을 가곤 합니다.
생각 없이 그저 몸 따라, 세상 따라 가면 사망과 화의 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항상 깨어 있으라.’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말씀에 청종하고 바로 의지함으로, 우리가 택하고 누려야 할 생명과 복의 길로 정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